1.1. 불길한 징조와 급작스러운 어명: 운명을 가르는 피의 소집
내금위 훈련장 - 1482년 늦은 봄날 오후
빗방울이 흩날리기 직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음습한 시간이었다.
하늘은 잿빛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함 속에서, 세상은 마치 숨을 멈춘 듯 정지해 있었다. 곧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은 그런 오후였다.
내금위 훈련장은 조선의 심장이 뛰는 곳이었다.
이곳의 공기는 늘 칼날처럼 서슬 퍼렀고, 일상은 규율과 반복, 그리고 극한의 절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새벽부터 해거름까지, 쉼 없이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고, 창을 던지는 훈련이 계속되었다. 땅을 딛는 발소리, 칼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그리고 날카로운 기합 소리가 하나의 리듬을 이루며 훈련장을 가득 채웠다.
무인들은 왕실의 권위를 수호하는 견고한 방패였으나, 그 방패 아래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과 긴장이 가득했다. 이것이 서천수를 비롯한 내금위 군관들의 **'일상 세계'**였다. 그들은 고요한 듯 보였으나, 밑바닥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미세한 균열을 느끼고 있었다.
훈련장 중앙에는 서른 명 남짓한 군관들이 대열을 이루고 서 있었다. 검은색 군복을 입은 그들은 일제히 목검을 휘두르며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종사관의 구령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이것이 왕을 지키는 최정예 무인들의 일상이었다.
긴장의 근원
이 긴장감의 근원은 궁궐 깊은 곳, 폐비 윤 씨의 존재에서 비롯되었다.
폐위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그녀의 친정 세력과 왕실의 대신들 사이의 권력 투쟁은 왕실의 권위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다. 조정은 보이지 않는 전쟁터였다. 한쪽에서는 폐비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래도 왕자들의 어머니가 아니냐며 반대했다.
폐비 윤 씨. 그녀는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중전이었다. 성종대왕의 정비였고, 왕자들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질투가 심했다. 왕의 총애가 다른 후궁에게 향하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왕을 할퀸 것이다.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낸 이 사건은 왕실의 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대신들은 들끓었고, 폐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성종은 고민했다. 그녀는 왕자들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왕으로서 권위를 세우지 못하면, 조정의 기강이 무너질 것이었다. 결국 그는 그녀를 폐위시켰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의 친정 세력은 계속해서 움직였고, 복위를 노리는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대신들은 성종에게 압박을 가했다. "폐비를 살려두면 화근이 될 것입니다." "왕자들을 위해서라도 깨끗이 정리하셔야 합니다." 성종은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비로서의 정과 왕으로서의 책임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서천수는 칼을 휘두르면서도, 이 불안감이 만들어낸 팽팽한 권력의 줄타기가 자신들의 목줄을 죄어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왕의 명령과 대신들의 눈치를 동시에 살펴야 하는 권력의 그림자 아래 놓인 비운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숙명은 충성이었지만, 그 충성이 가장 잔혹한 명령을 수행해야 할 때, 그들의 영혼은 흔들렸다.
서천수의 악몽
서천수는 최근 며칠간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꿈에서 그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았다. 어둡고 축축한 복도를 걷다가 울음소리를 듣고, 복도 끝에서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을 만났다. 그녀의 눈에서는 핏빛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원망과 슬픔, 그리고 저주가 담겨 있었다.
이 악몽이 사흘 밤 연속으로 이어졌다. 무인으로서 미신을 믿지 않으려 했으나, 이 음울한 시기에 꾼 꿈은 운명적인 불길함으로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마치 어떤 비극이 임박했음을 그의 영혼이 미리 감지하는 듯했다.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씻을 때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수척해진 얼굴, 시퍼런 다크서클, 창백한 안색. 아내 박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그는 괜찮다고, 그저 훈련이 힘들 뿐이라고 둘러댈 뿐이었다.
그가 검을 멈추고 불안하게 숨을 고르던 그때였다.
전령의 도착
저 멀리 궁궐 정문 쪽에서, 서리 복장의 젊은 관리 하나가 진흙탕을 가리지 않고, 마치 목숨을 건 듯한 속도로 훈련장을 향해 내달렸다.
그의 옷은 진흙과 물이 잔뜩 튀어 엉망이었고, 그의 얼굴은 공포와 충격으로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훈련장의 군관들이 하나둘 그를 알아차렸다. 칼을 휘두르던 손이 멈췄고, 활을 쏘던 이들이 시위를 놓았다. 모두의 시선이 달려오는 전령에게 집중되었다.
전령은 종사관 앞에 도달하자마자, 다리가 풀린 듯 무너져 내렸다. 그는 길게 숨을 몰아쉬었고, 그 헐떡이는 숨소리는 흡사 비명 소리처럼 훈련장에 울려 퍼졌다. 그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어, 어, 어명입니다! 폐비 윤 씨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어명이옵니다! 속히... 속히 집행하라 하셨습니다!"
시간이 멈춘 순간
순간, 시간마저 멈춘 듯했다.
훈련장의 모든 움직임이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났다. 훈련용 목검 하나가 쨍그랑! 하고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침묵을 찢으며 모두의 귓속에 박혔다.
서천수와 군관들의 얼굴은 일제히 잿빛으로 변했다.
사약(賜藥). 그것은 왕이 내리는 마지막 은혜이자 가장 무거운 징벌이었다. 왕명을 거역할 수 없는 무인이었지만, 한때 국모였던 이에게 사약을 내리는 임무는 인간의 도리를 넘어서는 잔혹함이었다.
서천수의 머릿속에서는 성종대왕의 고뇌가 스쳐 지나갔다. 유교적 도덕과 왕실의 권위 사이에서, 성종은 결국 왕권 강화를 위해 가장 냉혹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성종은 그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폐비 윤 씨는 그의 아내였다. 그녀와 함께 보낸 세월이 있었고, 그녀가 낳은 아들들이 있었다. 인간으로서 그는 그녀를 완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왕으로서 그는 단호해야 했다. 대신들은 그녀가 살아있는 한 왕권이 위협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친정 세력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보고했다.
'폐비를 제거하지 않으면, 후환이 두렵습니다.' '왕자들을 위해서라도, 지금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왕권을 확립하시려면, 흔들림 없는 단호함을 보이셔야 합니다.'
대신들의 압박은 날로 거세졌다. 성종은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그는 결단을 내렸다. 가장 냉혹한 결단을.
하지만 그 잔혹한 결정의 대가는 힘없는 하급 관료들에게 전가되었다. 군관들의 공포는 단순히 죽음을 집행하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적 파도에 휘말려 가문 전체가 몰락할 수 있다는 조선 시대 관료들의 근원적인 불안감이었다.
이 일에 연루되면, 훗날 어떤 화가 미칠지 알 수 없었다. 폐비의 아들들은 여전히 왕자였다. 그들 중 하나가 훗날 왕위에 오르면 어떻게 될 것인가? 어머니를 죽인 자들을 그냥 둘 것인가? 복수의 칼날이 자신들의 목을 겨누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이제 **'역사의 희생양'**이 될까 두려워했다. 이 비극적인 명령은 숨 막히는 공포와 피할 수 없는 책임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거부의 침묵
훈련장은 침묵 속에 갇혔다.
그 침묵은 모두가 운명으로부터의 도피, 즉 **'거부'**를 꿈꾸는 절망의 침묵이었다. 그 누구도 이 피의 사명을 자처하려 하지 않았다.
군관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마치 눈이 마주치면, 자신이 선택될까 두려워하는 듯했다. 바람이 불어와 훈련장의 먼지를 일으켰다.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곧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았다.
종사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어명을... 누가 받들겠는가?"
침묵.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다. 길고 무거운 시간. 훈련장의 공기는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냉혹한 지명
그때, 침묵을 깨고 좌승지 이세좌가 나섰다.
그의 얼굴은 냉철했지만, 눈빛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왕명을 거부하는 순간, 자신의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결정은 개인의 도덕성이 아닌, 가문과 정치적 생존을 위한 냉정한 선택이었다. 그는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임무를 수행할 자들을 지명해야 했다.
이세좌의 눈길이 내금위에서 가장 충직하고 뛰어난 군관인 서천수에게 닿았다.
그는 서천수의 무예와 충성심을 신뢰했지만, 바로 그 곧은 성품 때문에 이 임무에 가장 큰 고통을 받을 것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세좌에게 중요한 것은 집행의 완수였다.
"왕명이다. 지체할 수 없다. 좌승지 이세좌, 내금위 군관 서천수. 두 사람은 즉시 어명을 받들라. 폐비에게 사약을 내릴 것이니, 철저히 은밀히 진행할 것이다! 단 한 사람에게도 이 사실이 궁궐 밖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 이 일은 왕실의 기밀 중 기밀이다!"
찢어진 영혼
이 명령은 서천수에게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되었다.
그는 인간적인 연민과 무인으로서의 충성심 사이에서 영혼이 갈가리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폐비 윤 씨의 비참한 최후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하지만 왕명이라는 거대한 쇠사슬은 그 어떤 도덕적 고뇌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왕실 비극의 집행자로서, 자신의 운명을 되돌릴 수 없는 강으로 끌고 가게 되었다.
서천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잿빛이었으나, 눈빛에는 체념과 비장함이 교차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왕명을 받들었다.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내면에서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조선의 충직한 무인이 아니라, 왕권의 잔혹함을 대변하는 그림자임을 깨달았다. 내가 잡아야 할 것은 칼이 아니라, 한 여인의 목숨과 내 영혼의 평화를 앗아갈 사약이었다. 폐비의 저주보다 먼저, 왕명이라는 이름의 공포가 내 심장에 핏빛 낙인을 찍었다. 이 명령을 수행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예전의 서천수가 될 수 없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발걸음은 이미 비극적인 운명의 문턱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알지 못했다. 이 발걸음이 훗날 태어날 딸, 장금의 운명까지 피로 엮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어둠의 시작
서천수는 훈련장 구석에 놓인 작은 함에서 사약이 담긴 은잔을 조심스레 품에 넣었다. 은잔의 차가운 촉감은 그의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해는 이미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세상의 빛이 사라지는 이 시간에, 서천수와 이세좌는 폐비의 사가로 향하는 어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등 뒤로 훈련장의 소음은 완전히 사라졌고, 오직 피할 수 없는 운명만이 그들을 따라붙었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그들의 옷을 적셨다. 천둥이 울렸고,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 마치 하늘도 이 비극을 슬퍼하는 듯했다.
서천수의 품속에서 은잔이 차갑게 식어갔다. 그 안에 담긴 사약은 한 여인의 목숨을 앗아갈 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서천수 자신의 영혼도 죽일 독이었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걸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오직 빗소리와 발소리만이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궁궐의 담장이 보였다. 그 너머 어딘가에 폐비 윤 씨가 있었다.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하게 있을까?
서천수는 모르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가야만 했다. 왕명이었다. 거역할 수 없었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마치 다리에 쇠사슬이 감긴 것처럼.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앞으로,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야 했다.
어둠이 그들을 삼켰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1.2. 운명의 집행자들: 사약이 담긴 은잔과 피할 수 없는 징벌
폐비 윤 씨의 사가(私家)로 가는 길
해 질 녘, 세상의 빛이 완전히 사라지는 음습하고 고독한 시간이었다.
궁궐 문을 나선 서천수의 발걸음은 흙바닥에 박히는 쇠못 소리처럼 무거웠다. 그와 좌승지 이세좌, 그리고 몇 명의 호위 군관으로 이루어진 행렬은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마치 죽은 자들의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궁궐 문이 뒤에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무겁고 둔탁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마치 관 뚜껑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서천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는 것을.
하늘에서는 비가 계속 내렸다. 차가운 빗줄기가 옷을 적시고, 얼굴을 때렸다. 하지만 서천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감각은 이미 마비되어 있었다. 오직 한 가지만이 그의 의식을 지배했다. 품속에 품고 있는 은잔의 차가운 무게.
서천수는 품속 깊이 숨긴 은잔의 차가운 무게를 의식했다.
그 은잔은 단순한 독이 아니라, 왕권의 잔혹한 의지가 빚어낸 비극의 결정체였다. 은으로 만들어진 작은 잔. 그 안에 담긴 검붉은 액체. 그것은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독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왕의 의지였고, 권력의 폭력이었고, 정치의 냉혹함이었다.
그는 오늘, 국가의 대의라는 이름으로 가장 잔인한 명령을 강요받았음을 절감했다.
'국가의 대의.' 얼마나 거창한 말인가.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있는가? 권력을 지키려는 자들의 욕망.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자들의 계산. 정적을 제거하려는 자들의 음모. 결국 국가의 대의라는 것은, 힘없는 자들을 희생시키는 핑계에 불과했다.
조선의 역사는 때로 한 개인의 도덕적 양심을 짓밟고, 충성심의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서천수는 왕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국가의 질서를 지켰으나, 그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팔아야 했다. 그의 검은 정의와 수호를 위해 단련되었으나, 지금 그는 정치적 희생양의 목숨을 거두는 집행자가 되어야 했다. 이 길은 그가 자신의 도덕적 경계를 영원히 넘어버리는 길이었다.
십오 년 동안 그는 칼을 갈았다. 왕을 지키기 위해.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데 지금 그 칼은 무엇을 위해 쓰이는가? 한 여인을 죽이기 위해. 권력 투쟁의 희생양을 제거하기 위해. 왕실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그의 발걸음이 무거울수록, 충성심이라는 이름의 쇠사슬이 그의 영혼에 드리운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냉혹한 동행
좌승지 이세좌는 서천수의 옆을 걸으며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서천수의 고뇌와 달리, 냉철한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세좌는 이 임무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시험대임을 알고 있었다.
이세좌에게 폐비 윤 씨는 제거해야 할 장애물일 뿐이었다. 그녀가 살아있는 한, 왕권이 흔들렸다. 그녀의 친정 세력이 움직였다. 복위를 노리는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니 제거해야 했다. 냉정하고 신속하게. 흔적도 없이.
폐비의 사사(賜死)는 왕실 권력의 핵심인 인수대비의 뜻이었고, 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은 곧 권력의 정점에 서겠다는 맹세였다.
인수대비. 성종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실의 실질적 권력자. 그녀는 며느리인 폐비 윤 씨를 처음부터 탐탁지 않게 여겼다. 질투가 심하고, 성품이 고약하고, 왕비로서의 품위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폐비를 끌어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완전한 제거를 원했다.
이세좌는 그 뜻을 정확히 읽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일을 완벽하게 수행한다면, 인수대비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곧 조정에서의 확고한 지위를 의미했다. 승승장구하는 관직 생활을 의미했다. 부귀영화를 의미했다.
그는 떨리는 서천수의 어깨와 달리, 오직 야심과 냉혹한 논리만을 붙잡고 있었다.
서천수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든, 그것은 이세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임무의 완수. 그것뿐이었다.
되돌아갈 수 있는 **'일상 세계'**는 이미 궁궐 문이 닫히는 순간 산산조각 났다.
두 사람은 계속 걸었다. 비가 내리는 어둠 속을.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오직 발소리와 빗소리만이 침묵을 채웠다.
사가의 도착
마침내, 행렬은 한적한 시골 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폐비 윤 씨의 사가에 도착했다.
밤은 깊었고, 사방은 적막했다. 마을은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인가의 불빛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문을 굳게 닫고 숨죽이고 있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사가는 마치 오랜 기간 주인이 없는 것처럼 황량하고 고독해 보였다.
담장은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고, 기와지붕에는 이끼가 끼어 있었다. 정원은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한때는 왕비의 사가답게 웅장하고 화려했을 이곳이, 이제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마치 폐비의 몰락한 운명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안팎으로는 이미 삼엄한 군관들의 포위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사가를 둘러싼 담장마다 군관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횃불도 켜지 않고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고, 아무도 나갈 수 없었다. 완벽한 봉쇄였다. 이세좌가 사전에 철저히 기밀을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되었다. 왕실의 치부였다. 한때 국모였던 이를 사약으로 죽인다는 것. 그것이 알려지면 민심이 흔들릴 것이었다. '왕이 자신의 아내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었다. 그래서 이세좌는 철저히 비밀을 유지했다.
사가의 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소리는 마치 비극의 막이 오르는 신호음 같았다. 낡은 나무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내는 소리. 그것은 운명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서천수가 이세좌를 따라 문턱을 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인간 세상을 벗어나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섰음을 직감했다.
촛불 아래의 폐비
방 안에는 촛불 몇 개만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둠은 방의 구석구석을 집어삼켰고, 불빛이 닿는 곳만 겨우 폐비의 형체를 드러냈다. 촛불은 바람에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그림자가 벽에서 춤을 추었다. 마치 귀신들이 춤추는 것 같았다.
폐비 윤 씨는 그 가운데에 마치 석상처럼 홀로 앉아 있었다.
수년간의 유배 생활로 피폐해졌으나, 그녀에게는 여전히 한때 국모였던 이의 위엄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희끗희끗 세어 있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한때 화려했을 옷은 낡고 빛이 바랬다. 하지만 그녀가 앉아 있는 자세는 여전히 당당했다. 등은 곧게 펴져 있었고, 고개는 높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들고 온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체념한 듯하면서도, 동시에 경멸하는 듯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미소는 서늘했다. 마치 '마침내 왔구나. 기다렸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녀의 초연함은 오히려 서천수의 죄책감을 날카로운 비수처럼 찔러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이 올 것을.'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이 끝을.'
서천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만약 그녀가 울부짖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면 오히려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침착했다. 너무나 초연했다. 그것이 오히려 더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왕명의 선포
좌승지 이세좌는 방 중앙으로 걸어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냉혹한 이세좌라도, 한때 국모였던 이 앞에서 사약을 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성종대왕의 어명을 고했다.
"폐인 윤 씨."
이세좌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성종대왕께옵서 어명을 내리셨나이다. 그대의 죄가 무거우니, 사약을 내리노라."
그 순간, 폐비 윤 씨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 눈빛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오랜 응어리가 폭발하는 원한의 불꽃이었다. 수년 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분노, 원망, 슬픔, 그리고 깊은 증오.
"어명이오? 왕의 명령이라..."
폐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성종(成宗)이 끝내 이리 나오는구나."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계속했다.
"이세좌.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내금위 군관."
그녀의 시선이 서천수에게로 향했다.
"너희들! 너희들의 얼굴을 내 눈에 똑똑히 새겨두마."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너희는 지금 왕명의 충실한 종복이 아니라, 나의 피를 담는 그릇이 될 것이다!"
저주의 시선
폐비는 서천수를 똑바로 응시했다.
서천수는 차마 그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 눈빛은 자신의 영혼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섬뜩함을 안겨주었다. 마치 그녀의 눈이 서천수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꿰뚫어 보는 듯했다.
서천수는 공포와 함께, 그녀를 향한 지독한 연민을 느꼈다.
그녀는 한때 이 나라의 왕비였으나, 지금은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되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야 하는 나약한 여인일 뿐이었다. 그녀도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어머니였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슬퍼하는 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권력의 소용돌이는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서천수는 속으로 절규했다.
'한 인간의 목숨을 빼앗고 있다. 왕명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미 너무 늦었다.
사약의 집행
이세좌는 떨리는 손으로 사약이 담긴 검붉은 은잔을 폐비 앞에 내려놓았다.
"마마... 어명입니다. 소신들... 부디..."
이세좌의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도 인간이었다. 아무리 냉혹하다 해도, 이 순간만큼은 괴로웠다.
폐비 윤 씨는 잔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은 놀랍게도 떨리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의 위엄을 지키려 애쓰는 듯했다. 그녀는 은잔을 들어 올렸다. 검붉은 액체가 희미한 촛불에 비춰지며, 방 전체에 핏빛 그림자를 드리웠다.
잔 안의 액체가 흔들렸다. 독특한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쓰디쓴 약재 냄새. 죽음의 냄새.
폐비는 잔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말없이.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했다.
"천지신명이여!"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내가 죄인이라면 이 벌을 달게 받겠으나! 만약 내가 억울하다면! 나의 이 피눈물이! 이 사약을 내린 자들과, 이 명령을 집행한 자들의 후손에게 대대손손 갚게 하소서!"
그녀는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지옥의 순간
순간, 방 안은 지옥으로 변했다.
사약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폐비 윤 씨는 피를 토하며 몸부림쳤다. 그녀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손발이 뒤틀렸다. 눈이 뒤집혔다. 그녀는 바닥을 굴렀다.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그 격렬한 고통의 비명은 서천수의 영혼을 꿰뚫고 들어와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서천수는 이 잔혹한 광경을 눈앞에서 직접 목도해야 했다. 그는 눈을 감고 싶었다. 귀를 막고 싶었다.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것이 그의 임무였다. 끝까지 지켜봐야 했다. 폐비가 완전히 숨을 거둘 때까지.
그의 군관으로서의 충성심이 인간적인 도리를 짓밟아버린 이 순간은, 그에게 **'시련'**이자, 평생 지속될 악몽의 시작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피의 저주
폐비 윤 씨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그녀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 자신의 피가 묻은 붉은 한복 소매를 찢어내었다. 그 찢겨진 천 조각은 흡사 붉은 깃발처럼 허공에 흩날리더니, 이세좌와 서천수를 향해 던져졌다.
"이세좌... 서천수..."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기억하라! 너희들의 자식들의 운명까지... 나의 이 피로 저주하노라!"
그녀의 몸이 차가운 방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그녀의 마지막 원한이 담긴 핏빛 헝겊 조각은 정확히 서천수의 발밑에 떨어졌다.
그 순간, 서천수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이 핏빛 헝겊 조각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폐비의 저주가 서천수의 운명에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박혔음을 상징했다.
서천수는 그 천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촛불에 비친 그것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폐비의 피. 그녀의 원한. 그녀의 저주. 모두가 그 작은 천 조각에 담겨 있었다.
서천수는 충격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비참하게 죽어간 한 여인의 원한과, 핏빛 헝겊 조각에 맺힌 저주의 무게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는 자신이 이제 운명적인 덫에 걸렸음을 절감했다. 왕명을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미래의 파국을 예고하는 가장 잔혹한 징벌을 받아들인 셈이었다.
냉혹한 퇴장
이세좌는 이 끔찍한 임무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시신을 수습하도록 명하고 자리를 떴다.
그의 임무는 끝났고, 그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안위와 정치적 보상에만 있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쓰러진 폐비도, 굳어버린 서천수도. 그저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서천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꼼짝없이 서서, 발밑의 붉은 천 조각을 응시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다른 군관들이 폐비의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에도,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것이 끝인가?'
'이렇게 한 사람의 생이 끝나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파멸의 시작
궁궐로 돌아온 서천수는 훈련장에 복귀했으나, 그의 영혼은 이미 폐허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칼을 잡을 수 없었다. 칼을 들면 손이 떨렸다. 검을 휘두르면 폐비의 얼굴이 보였다. 활을 쏘려 하면 그녀의 비명이 들렸다.
폐비의 저주가 자신에게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강박적인 공포가 그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는 밤마다 꿈에서 폐비의 비명과 핏빛 얼굴을 보았고, 잠에서 깨면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똑같은 악몽이 반복되었다. 사가의 그 방. 촛불. 폐비의 얼굴. 사약을 마시는 순간. 피를 토하는 모습. 그리고 핏빛 천 조각.
그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자다가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아내 박씨가 놀라서 깨어나 그를 흔들었지만,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얼굴과 눈빛은 그날 밤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동료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천수, 무슨 일이 있었나?" 하지만 서천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었다. 이 일은 왕실의 기밀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었다.
결국 서천수는 스스로 군관직을 버리고 궁궐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이는 그가 운명에서 벗어나려 시도한 절망적인 몸부림이었다. 그는 평범한 삶 속에 숨어버린다면, 이 끔찍한 저주를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왕명을 거역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왕의 세상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관들이 만류했다. "십오 년을 일한 자리를 그냥 버리고 가는 것이냐?" 하지만 서천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궁궐 문을 나섰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1.3. 폐비의 저주와 도사의 예언: 엇갈린 운명의 서막
궁궐을 벗어난 외딴 산길, 인적이 드문 초가집
1482년 이후, 세월이 흐른 어느 가을날.
서천수는 궁궐을 뛰쳐나온 이후, 이름을 버리고 신분을 숨긴 채 떠돌이 삶을 시작했다.
궁궐 문을 나선 그날,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십오 년을 몸담았던 곳. 동료들과 함께 땀 흘리며 훈련하던 곳.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던 곳. 하지만 이제 그곳은 그에게 지옥이었다. 악몽의 근원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의 도피는 왕실의 징벌을 피하려는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폐비 윤 씨의 저주에서 벗어나려는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그는 밤마다 폐비의 마지막 비명과 핏빛 한복을 보았고, 그 끔찍한 기억은 그의 영혼을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잠들면 그 방이 나타났다. 촛불이 흔들리는 어두운 방. 폐비가 앉아 있는 모습. 사약을 마시는 순간. 피를 토하는 장면. 그리고 핏빛 천 조각이 자신의 발밑에 떨어지는 순간.
매번 같은 꿈이었다. 깨어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는 밤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잠드는 것이 공포스러웠다.
떠돌이의 삶
그가 궁궐을 떠날 때 챙겨온 것은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다시는 잡지 않으리라 맹세한 오래된 검이었다. 십오 년 동안 그와 함께했던 검. 그 검으로 수없이 훈련했고, 왕을 지켰다. 하지만 이제 그 검은 저주받은 물건이었다. 폐비를 죽이는 데 사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 밤 그것을 차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검을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발밑에 떨어졌던 핏빛 붉은 헝겊 조각이었다.
그는 그 헝겊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저지른 비극이자, 운명의 덫이 존재함을 알리는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었기 때문이다. 폐비가 마지막 순간에 찢어낸 그 천 조각. 피가 묻은 그 천 조각. 저주가 담긴 그 천 조각.
서천수는 그것을 품속 깊이 간직했다.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살기 위해.
그는 이 핏빛 헝겊 조각이 자신의 핏줄, 훗날 태어날 자식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에 시달렸다.
폐비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너희들의 자식들의 운명까지... 나의 이 피로 저주하노라!"
'자식들의 운명까지.' 그 말이 무슨 뜻인가? 자신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자식이 태어나면? 그 아이도 이 저주를 받는 것인가? 아무 죄도 없는 아이가?
서천수는 그 생각만으로도 견딜 수 없었다.
방랑의 세월
수년간의 방랑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벌했다.
사람들을 피하고, 인연을 맺지 않았다. 마을에 들어가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피했다.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정을 나누지 않았다. 오직 홀로, 떠돌았다.
그는 산 속을 헤맸다. 깊은 계곡을 건넜다. 인적이 드문 길을 걸었다. 때로는 며칠씩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것이 좋았다. 사람들의 눈빛이 두려웠다. 혹시 그들이 자신의 죄를 알아볼까 봐.
밥을 구걸하며 살았다. 때로는 일을 해서 품삯을 받았다. 나무를 패거나, 땅을 갈거나, 짐을 날랐다. 군관 시절의 자존심 같은 것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벌이었다.
그는 더 이상 충직한 무인이 아니었다. 그는 죄책감과 공포에 사로잡힌, 살아 있는 망령이었다.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계절은 바뀌었지만 그의 고통은 변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지만 악몽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졌다.
운명적 만남
어느 날, 서천수는 깊은 산중, 약초를 캐는 듯 보이는 기이한 노인을 만났다.
그것은 가을날 오후였다. 단풍이 물든 산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앞에서 한 노인이 허리를 굽히고 땅을 살피고 있었다. 약초를 찾는 듯했다.
서천수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 평소처럼 사람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노인이 먼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서천수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빛은 세월의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맑았으나, 동시에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고 있는 듯 어두웠다. 백발이 허리까지 늘어진 노인이었다.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했지만, 눈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맑았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방랑하는 이여."
노인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그대의 걸음은 수많은 핏빛 그림자를 밟고 왔군."
서천수는 멈칫했다. 무슨 말인가? 자신을 아는 사람인가?
"폐비 윤 씨의 원한이 그대의 영혼에 쇠사슬처럼 감겨 있소."
그 순간, 서천수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폐비 윤 씨. 그 이름. 자신이 지난 수년간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이름. 꿈에서만 들었던 이름. 어떻게 이 노인이 그 이름을 아는가?
"그 쇠사슬은 그대 자신이 아니라, 그대의 가장 소중한 핏줄을 옭아맬 것이니."
노인의 말이 계속되었다.
서천수는 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궁궐을 나올 때부터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이 노인은 어떻게 아는가? 폐비 윤 씨를. 자신의 죄를. 그리고 저주를.
핏빛 증거
그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의 핏빛 헝겊 조각을 꺼내 보였다.
"도사님..."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이 징벌이... 이 저주가 제 자식에게까지 미친다는 말씀이십니까?"
도사는 붉은 헝겊 조각을 잠시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한참을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벗어날 수 없소."
단호한 선언이었다.
"운명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겨어내는 것이오."
도사는 잠시 멈췄다가 계속했다.
"그러나 겪어내는 방식에 따라 길은 갈릴 수 있지."
그는 다시 헝겊 조각을 바라보았다.
"자식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소. 하늘의 이치와 땅의 원한이 엮여 피할 수 없는 굴레가 되었소."
서천수는 무릎이 꺾였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제가 무엇을 희생해야만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잔인한 예언
도사는 서천수에게 단 하나의 절망적인 예언을 건넸다.
이 예언은 서천수의 남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잔인한 경고였다.
"그대의 핏줄, 장차 태어날 딸은 두 개의 극단적인 운명을 타고났소."
'딸.' 서천수는 그 말에 숨이 막혔다. 자신에게 딸이 태어날 것이라는 말인가? 그리고 그 아이가 저주를 받는다는 말인가?
도사는 계속했다.
"첫 번째 길은 궁궐에 들어가 칼을 받는 운명."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만약 그 아이가 궁궐의 지밀(至密)한 곳에 발을 들이면, 가장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고 칼을 맞아 죽게 될 것이오."
서천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는 폐비의 원한이 이세좌와 그대에게 내린 징벌의 완성이지."
폐비의 저주.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딸을 통해.
"두 번째 길은 궁궐을 돕는 운명."
도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궁궐에 들어가 왕을 돕는 사람이 된다면, 조선의 역사상 아무도 오르지 못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오."
영광? 저주 속에 영광이 있다는 말인가?
"기억하시오."
도사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궁(宮)에 들어가면 살고, 궁을 나가면 죽는다.'라는 단순한 이치가 아니오."
그는 서천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나, 가장 멀리 있는 길'**을 찾아야 하오."
무슨 뜻인가? 가까운 곳이면서 먼 길?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아이의 운명은 비극과 영광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으니, 그대의 선택에 따라 피의 수레바퀴가 돌 것이오."
절망의 선택
서천수는 절망했다.
딸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죽음과 영광이라는 극단적인 저울 위에 놓여 있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아이가 벌써 운명에 갇혀 있다니.
그는 딸을 궁궐과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궁궐에 들어가면 칼을 맞는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절대로 궁궐에 보내지 않는 것이다. 궁궐과 관련된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살 수 있다.'
그는 도사에게 절하며, 예언의 해답을 구했다.
"도사님, 그 두려운 운명에서 제 아이를 구하려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간절한 물음이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을 위한 아버지의 절규였다.
도사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답은 그대의 마음속에 있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궁궐의 그림자가 닿지 않는 곳, 가장 평범하고 숨겨진 삶만이 그대를 살릴 수 있소."
그는 핏빛 헝겊 조각을 가리켰다.
"핏빛 헝겊 조각을 간직하되, 그대가 살았던 세상에서 가장 멀리 도망치시오."
새로운 결심
도사의 예언은 서천수의 도피에 절대적인 명분을 부여했다.
이제 그의 도피는 단순히 자신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딸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을.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딸을. 하지만 분명히 태어날 딸을.
그는 폐비의 저주로부터 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단했다.
군관으로서의 자부심. 무인으로서의 명예. 조선의 신하로서의 충성. 모든 것을 버리기로 했다.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딸을 살리는 것.
그는 이제 군관 서천수가 아닌, 운명에 맞서 싸우는 아버지가 되었다.
도사와 헤어진 후, 서천수는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곳. 궁궐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 곳. 권력의 그림자가 닿지 않는 곳.
운명의 여인
그는 도망친 끝에, 궁궐의 삶과는 완전히 단절된 조용한 산골 마을에 정착했다.
그곳은 작은 마을이었다. 몇 집 되지 않는 가구들이 모여 사는 곳. 농사를 짓고, 산에서 나물을 캐고, 소박하게 사는 곳. 그곳에는 권력도, 음모도, 저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처럼 한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폐비 윤 씨 사건으로 궁궐에서 쫓겨난 궁중 나인이었다. 그 나인 역시 궁궐의 잔혹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도망쳐 숨어 살고 있었다.
폐비가 폐위될 때, 그녀를 모시던 궁녀들도 함께 쫓겨났다. 연좌제였다. 폐비를 가까이에서 모셨다는 이유만으로, 그들도 궁궐에서 쫓겨나야 했다. 어떤 이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어떤 이는 속가로 내려가 결혼했다. 그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박 씨. 훗날 장금의 어머니가 될 여인이었다.
그녀도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폐비가 쓰러지던 날을 기억했다. 울부짖던 소리를. 절규하던 목소리를. 그리고 자신들을 향해 던진 저주의 말을.
상처받은 두 영혼
서천수와 박 씨는 서로의 깊은 상처와 비밀을 공유하며 사랑에 빠졌다.
처음에는 서로 경계했다. 서천수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려 했고, 박 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서로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서천수가 악몽을 꾸고 깨어났을 때, 박 씨도 깨어 있었다. 그녀도 같은 악몽을 꾸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그날 밤 서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서천수는 자신이 폐비에게 사약을 전한 군관이었음을 고백했다. 박 씨는 자신이 폐비를 모시던 궁녀였음을 말했다. 두 사람은 울었다. 함께 울었다. 그리고 서로를 위로했다.
그들의 만남은 비극의 그림자 아래에서 피어난 연약한 희망이었다.
두 사람은 궁궐이라는 거대한 권력의 무대에서 튕겨져 나온 운명의 동지였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결혼하기로 했다. 이 산골 마을에서 조용히 살기로 했다. 과거를 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했다.
장금의 탄생
서천수는 박 씨와 결혼하여 조용히 살았고, 마침내 딸, 장금이 태어났다.
그날은 봄날이었다.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화창한 날이었다. 산골 마을의 작은 초가집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건강한 울음소리였다.
산파가 나와서 말했다.
"아드님이오!"
하지만 다시 들어가더니 이내 나왔다.
"아니오, 따님이시오!"
딸이었다. 도사가 말한 대로 딸이었다.
서천수는 떨리는 손으로 아기를 안았다. 작고 연약한 생명.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기. 그의 딸. 그런데 이미 저주 아래 놓인 아이.
그는 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도사의 섬뜩한 예언을 떠올렸다.
"궁에 들어가면 칼을 맞아 죽고, 궁을 도우면 가장 높은 곳에 오른다."
서천수는 이 예언을 딸에게 짊어지게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딸이 글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글을 알면 궁궐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딸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오직 집 안에서만, 부모 곁에서만 살게 했다.
"장금아, 너는 절대로 궁궐에 가서는 안 된다."
그는 딸에게 반복해서 말했다.
"궁궐은 무서운 곳이다. 나쁜 곳이다. 절대로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
어린 장금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궁궐이 무서운 곳인지. 왜 가까이 가면 안 되는지. 하지만 아버지의 눈빛이 너무 심각해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
하지만 운명은 이미 붉은 헝겊 조각처럼 그들의 삶에 각인되어 있었다.
서천수가 아무리 노력해도, 운명의 수레바퀴는 이미 돌기 시작했다. 폐비의 저주는 살아 있었고, 도사의 예언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천수는 매일 밤 핏빛 헝겊 조각을 꺼내 보았다. 촛불 아래에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폐비의 피가 묻은 그 천. 저주가 담긴 그 천.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지킬 수 있는가?'
하지만 답은 없었다. 도사는 말했다. "운명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겪어내는 것이오." 그렇다면 결국 장금은 그 운명을 겪어내야 하는 것인가?
서천수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필사적인 노력이 오히려 딸을 더 큰 위험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을. 궁궐에서 멀리 떨어뜨리려는 그의 노력이, 결국에는 딸을 궁궐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운명의 아이러니였다. 피하려 할수록 더 가까워지는 운명. 도망치려 할수록 더 빨리 다가오는 미래.
장금은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의 두려움 속에서. 어머니의 슬픔 속에서. 그리고 알지 못하는 저주 속에서.
하지만 그 아이는 밝았다. 호기심이 많았다. 똑똑했다. 마치 운명이 그 아이에게 특별한 재능을 부여한 듯했다.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아이답게.
서천수는 그 모습을 보며 두려웠다. 딸이 뛰어날수록, 그는 더 두려웠다. 뛰어난 아이는 숨길 수 없었다. 언젠가는 세상이 그 아이를 발견할 것이었다. 그리고 궁궐이 그 아이를 부를 것이었다.
'아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서천수는 다짐했다. 딸을 지키겠다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지만 운명은 이미 시작되었고, 멈출 수 없었다.